12시간을 ‘침묵으로’ 기다린 1만 명의 시민… 中 심장부는 떨었다

1999년 4월 25일, 중국공산당의 심장부 베이징 중난하이에 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들은 어떤 피켓이나 구호도 없이 조용히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1989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유와 민주를 외쳤다. 하지만, 그 꿈은 탱크에 완전히 짓밟혔다. 피로 물든 거리, 짓이겨진 사람들…. 공산국가 중국에도 봄이 올 거란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그날 이후 누구도 자유와 민주를 감히 외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9년 4월 25일,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할 사건이 일어났다. 긴장감이 감돌던 중국공산당의 심장부 베이징 중난하이에 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것이다. 이들은 꼬박 12시간 이상을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 현수막이나 피켓, 어떤 구호도 없었다.

외신들은 “10년 만에 중국에 봄이 찾아왔다.”라며 발 빠르게 보도했다. 만 명의 시민이 평화롭게 청원하는 분위기가 중국에서 또다시 연출된 것은 가히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톈진 사건’

베이징과 인근 농촌 마을에서, 더 멀리 12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온 이들,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만여 명의 시민들은 파룬궁(파룬따파) 수련인들이었다. 이들은 12시간 넘도록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파룬궁을 표적으로 삼아 탄압의 고삐를 조여오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룬궁은 탁월한 건강 증진 효과로 당시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였다.

1992년 처음 알려지기 시작해 1998년에는 수련자 수가 1억 명에 육박했다. 국가 의료비가 획기적으로 감소하자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중국공산당 정부는 수련자 수가 공산당원 수를 넘어서자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1996년, 중앙선전부는 베스트셀러였던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轉法輪)』을 출간 금지했고, 언론을 움직여 톈진 교육 당국이 파룬궁 허위 비방 논평을 싣게 하고, 허위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찾아간 수련인 45명을 이미 불법 연행했다. 일명 ‘톈진 사건’이 수련인 1만 명이 중난하이에 모인 이유였다.

허위 비방 논평을 쓴 허쭤슈는 기공과 중의학 등 전통문화 비판으로 악명 높은 어용 과학자였다. 그는 베이징 TV에 출연해 막말로 물의를 일으킨 다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내세워 허위 비방 논평을 게재했다.

붉은 담장의 문이 열리다

쿵하이옌(孔海燕)의 ‘1999년 4월 25일(一九九九年四月二十五日)’. 이 작품은 2020년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 금상수상작이다. 작가 쿵하이옌 역시 4월 25일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그림 속에 실존 인물 400여 명을 그려 넣었다. 길이 4m에 달하는 거대한 유화 작업을 하는데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5년. 작가는 “이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청원하는 수련생 중 한 명과 경찰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등 세 가지 주요 사건을 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날, 청원하는 수련인들 앞에 익숙한 사람이 등장했다. 주룽지 총리였다. 그는 수련인들에게 이곳에 왜 왔냐고 물으며, 대표가 있다면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주변에 있던 세 명의 수련인이 자원했다. 이들이 ‘톈진 사건’에 대해 말하자, “내가 이미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는데요?”라며 주 총리는 의아해했다. 당시 함께 있던 수련인들은 주룽지 총리의 지시가 누군가에게 가로막혀 전달되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 총리는 민원 처리 국장과 국무원 부비서장과 면담하게 해준 뒤 출근했다.

오후 3시쯤 되자 갑자기 주변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중난하이에서 나온 무장 경찰들은 촘촘히 서서 거리를 봉쇄해 사실상의 계엄이 시작됐다. 그때 검은색 방탄 승용차가 중난하이에서 나왔다. 차는 멈추지 않고 남쪽으로 빨리 달려 다른 출입구로 재빨리 들어갔다. 장쩌민 국가 주석이었다.

저녁 9시쯤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면담에 참석했던 수련생들이 중난하이에 나와서 말했다. “톈진에서 수련생들을 풀어줬습니다!” 그제서야 수련생들은 안심하고 해산했다.

박해가 이미 시작되다

하지만 그날 밤 장쩌민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공산당의 유물론과 무신론으로 파룬궁을 제압할 것.”이라며, 전체 당원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장쩌민 문선 제2권에 새로운 신호라는 문서로 수록되어 있다.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6월 10일 파룬궁 박해 전담 기구인 ‘610 사무실’을 조용히 만든 이후, 나흘 뒤엔 “파룬궁을 안심하고 수련하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경계가 느슨한 틈에 각 지역의 수련생 정보를 샅샅이 뒷조사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7월 20일, 장쩌민은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을 능가하는 국가적 차원의 탄압이었다. 10년 전 평화롭던 톈안먼을 피로 물들게 해 공산당 총서기로 등극한 그에게 공포와 숙청은 가장 ‘편리한’ 정치도구였다.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불법 감금한 파룬궁 수련인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해 매매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저질러온 이 극악한 범죄는 2019년 런던 중국재판소에서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