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의 예와 부부의 의리

글/ 여남(予楠)

1. 혼례가 예의 근본이 된 유래

《통전·예전(通典·禮典)》의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대에 복희 씨가 혼인 예법을 제정했다. 서주 시대에 이르러 《예기(禮記)》는 혼인 의례를 상세히 기록했다. “천지가 합해야 만물이 생겨난다. 혼례는 만세의 시작이다.” 천지가 서로 어울러져야 만물이 생겨나듯, 남녀가 혼례를 치르는 것은 자손 대대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말하길, 혼례는 예의 근본이다.” 혼례는 모든 예법의 근간이라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남녀에 구별이 있어야 부부에 의리가 있고, 부부에 의리가 있어야 부자간에 친함이 있으며, 부자간에 친함이 있어야 군신 간에 올바른 관계가 있다”고 여겼다. 부부의 의리는 부자간의 친함과 군신간의 올바른 관계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혼약에서 혼례까지 모든 과정을 매우 엄숙하게 여겼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고, 혼인은 가정의 시작이며, 혼례는 가풍과 가정교육의 출발점이자 남녀 양가가 새로운 인척관계를 맺고 새로운 친인척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시작점이다.

2. ‘하늘이 맺어준 결합’의 참된 의미

현대인들은 ‘하늘이 맺어준 결합(天作之合)’이라고 하면 ‘행복한 결혼’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도 완전히 새로운 현대적 의미를 갖게 됐다. 예를 들어 남녀평등, 집과 차 소유, 두 독립된 개체의 결합이지 종속관계가 아님, 딩크족의 자유 중시, 불행한 결혼을 끝내는 것은 실패가 아닌 용기 등등이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역대 왕조는 모두 혼인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여겼고, 안정적인 정서적 지지, 가문의 혈통 계승, 사회의 세대 간 문화전통 전승, 사회 안정과 질서 강화의 기초로 여겼다.

1) 북송의 유정식이 혼약을 신의 있게 지킨 이야기

북송 시대 제(齊) 지방 사람 유정식(劉庭式)은 정직하고 마음이 넓으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소개를 통해 동향 여인과 평생을 약속했고, 양가는 중매인의 주선으로 혼약을 맺었다. 몇 년 후 예물을 보내 신부를 맞이해 백년가약을 맺기로 했다.

그런데 유정식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그의 약혼녀가 병에 걸려 맹인이 됐다. 여자의 집은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으로 권세도 없어 감히 딸의 혼사를 다시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여인은 늘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했다.

약혼녀의 변고 소식은 당연히 유정식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이제는 출세했으니 농가의 맹인 여자를 맞이하지 마시오”라고 권했다. 유정식은 웃으며 말했다. “내 마음은 이미 그녀에게 허락했소. 비록 그녀가 두 눈을 잃었지만 어찌 당초의 본심을 어길 수 있겠소.” 결국 그는 맹인 여자를 맞이했고, 서로 부축하며 백년해로했다. 사람들은 이를 천고의 미담으로 전했다.

‘하늘이 맺어준 결합’의 관점에서 보면, 유정식은 전생에 그 여인에게 은혜를 입었을 수 있고, 이번 생은 은혜를 갚으러 온 것이다. 그는 해냈고, 따라서 두 사람의 인연도 원만한 결말을 맺었다.

2) 청대 진잠원이 남의 혼약을 이루게 한 이야기

청나라 강소성 가정 출신 진잠원(秦簪園)은 과거에 급제했을 때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재혼했다. 신혼 첫날밤, 재혼한 여인이 슬피 울며 멈추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여인이 말했다. “저는 어릴 때 이웃 마을 리씨 집 아들과 혼약했는데, 부모님이 리씨 집안이 가난하다며 리씨 집안에 파혼을 강요하고 저를 개가시켰습니다. 두 성씨를 섬기게 된 것이 부녀자의 도에 어긋나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진잠원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말했다. “왜 일찍 말하지 않았소. 하마터면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구려!” 그는 신방을 나와 하인을 시켜 리씨 집 아들을 찾아오게 했다. 리씨 아들이 도착하자 진잠원은 상황을 설명하고 말했다. “오늘 같은 좋은 밤, 두 분이 저희 집에서 혼례를 치르시오.” 그리고 혼례에 쓴 모든 돈과 물건을 그들에게 선물했다. 두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진잠원의 이 같은 행적은 당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건륭 28년 계미년에 진잠원은 진사에 급제했다. 황제가 직접 장원으로 뽑아 그는 천하의 으뜸이 됐다.

진잠원은 남의 곤경을 이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이전 혼약을 존중하고 이뤄지게 했다. 이런 군자의 덕과 선을 쌓는 행위는 그가 나중에 진사에 급제하고 장원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4. 혼인에 대한 태도는 품행의 양심저울

혼인을 대하는 태도는 한 사람의 품행을 재는 ‘양심저울’이다. 수천 년 동안 혼인의 예를 지키는 사례들은 대대로 전해졌으며,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주변 집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며 ‘천지에 절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면서, 혼인이 인륜지대사임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따라서 인연을 배반하는 것은 사람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이 됐다.

1) 최호의 무절제한 혼사에 사람들이 멀리하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따르면, 당나라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최호(崔顥)는 젊어서부터 출세했으나 행실이 방종하고 술과 도박을 즐겼으며, 무엇보다 여색을 절제 없이 탐했다. 아내를 고를 때는 오직 미인만 골랐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버렸다”. 시문 실력은 괜찮았지만 명성은 줄곧 좋지 않았다.

▲ 고대의 당나라 시기 결혼식을 묘사한 그림[중국 민간 연화(年畫)]

당시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인 이옹(李邕)이 최호의 시명(詩名)을 듣고 직접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최호가 와서 바친 시의 첫 구절이 “열다섯에 왕창(王昌)에게 시집가”였고, 이옹이 듣자 음란한 풍조여서 크게 노해 “어린놈이 무례하구나!”라며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고, 다시는 교류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혼사가 무절제한 자를 모두 경멸하고 멀리했다.

2) 덕과 의리를 중시해 거처에 법도가 있었던 사마광

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는 결코 자신을 방종하게 하지 않는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결혼 후 10여 년간 자녀를 얻지 못했는데, 부인 장씨(張氏)는 매우 조급해했다. 사마광이 위로하며 말했다. “자식의 유무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니 억지로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오.” 장씨는 계속 그를 위해 첩을 들이려 했지만 사마광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 북송의 정치가, 역사가였던 사마광

한번은 장씨가 젊은 처녀를 물색해 첩으로 삼으려 했다. 그녀를 서재로 보냈는데 사마광은 처녀가 곁에 다가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처녀가 그의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책을 들고 물었다. “대인, 이것은 무슨 책이옵니까?” 뜻밖에도 사마광은 정중하게 손을 모아 인사하며 답했다. “이것은 『상서(尙書)』요.” 그리고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처녀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나중에 장씨가 또 다른 처녀를 골라 첩으로 삼으려 하면서, 자신은 핑계를 대고 외출하며 그녀에게 저녁에 나리의 서재로 가라고 일렀다. 처녀가 차를 들고 저녁에 서재로 갔는데, 사마광이 이 처녀가 자기 서재에 나타난 것을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부인이 안 계신데 네가 여기 와서 뭘 하느냐? 빨리 가거라!” 그렇게 즉시 그녀를 내보냈다.

『송사(宋史)』는 사마광을 “거처에 법도가 있고 행동에 예가 있다”고 평가했으니, 절개를 지키고 덕이 두터운 선비였다.

5. 문화대혁명 후의 중국의 혼인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은 생산수단이 없어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엥겔스는 ‘무산계급’을 현대 고용노동자로 정의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무산계급은 국가정권을 장악한 통치계급이 됐고, 사유재산이 없는(무산) 사회형태를 대표한다고 한다. 수천 년간 혼인과 화합은 어느 시대에나 대사(大事)였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근대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근대 중국 이혼 제1호는 서지마(徐志摩)다. 그는 1922년 본처 장유의(張幼儀)와 법적 절차를 거쳐 이혼했는데, 이유는 장유의와의 결혼 기간 중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고 자유연애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서지마의 재촉과 압박으로 막 둘째를 낳고 산후 조리 중이던 장유의는 이혼 동의서에 서명했다. 유명한 ‘도비(刀妃) 혁명’, 즉 마지막 황비 문수(文繡)와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이혼도 9년 후인 1931년의 일이었는데, 이유는 부의의 냉대와 궁중의 부자유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혼 ‘선봉’ 사례가 있었지만, 전통은 여전히 중국인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민국 시기 중국인의 이혼율은 여전히 매우 낮았는데, 이미 ‘개화’된 상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해시 사회국 업무보고』에 따르면, 1929년 10만 명당 23.82건의 이혼이 있었으니 백분율로 0.024%였다. 이는 2024년 중국 이혼율의 1/104에 불과하다.

6. 신성한 혼인

혼인 가치 인식의 전복은 직접적으로 사회도덕의 타락을 초래했고, 문란한 성생활이 만든 거대한 업력(業力)은 또 관련 악성 질병의 전파와 불치병을 가져왔다. 모두가 에이즈 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많은 유명인사와 권력층도 에이즈 환자 돕기를 자신의 프로젝트로 삼는데, 이 질병이 마귀가 성적 문란을 조장해 인류에게 가져온 재앙임을 어찌 알겠는가?

현대는 겉으로는 차량이 북적이고 고층빌딩이 즐비하지만, 실제로는 도덕이 구제불능 지경까지 추락했다. 쉽게 이혼하는 풍조는 당사자의 음덕(陰德)을 해칠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많은 이들이 평생 지울 수 없는 악과(惡果)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