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공산주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인터뷰] 장춘케이블방송 삽입 해외 생존자 김학철氏

 

장춘시에 거주하던 파룬궁 수련생 김학철 씨. 2002년 김 씨는 중공의 불법적인 탄압과 거짓 선전의 진상을 장춘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케이블TV방송에 진상 영상을 삽입했다. 당시 한 번의 방송으로 100만 명 이상이 진상을 알게 되었다. /촬영=김국환

“니가 김학철이야? 올 것이 왔군!”

2003년 2월, 학철 씨는 공안에 잡히고 말았다. ‘장춘 케이블 방송 삽입’ 사건에 참여한 뒤 1년 만이었다. 파룬궁 수련생인 조선족 김학철(49) 씨는 공안의 추적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고 있었다. 집 주변에 매복한 공안에게 붙잡힐 수 있었기에 그는 지난 1년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장춘 케이블 방송 삽입’ 사건은 중국 길림성 장춘시 파룬궁 수련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 중공이 연출한 분신자살 사건 등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TV신호를 삽입한 사건이다.

“방송 삽입에 참여했어, 안 했어?”

“……”

학철 씨가 입을 다물자, 고문이 계속됐다. 두 팔을 몸 뒤로 묶은 뒤 매달자 어깨가 탈골됐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공안은 그의 얼굴에 검은 봉지를 뒤집어씌워 숨통을 조였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봉지가 숨통을 조였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그는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징역 10년 구형. 철창 속에서 긴 시간 세뇌와 구타가 이어졌지만, 그의 마음을 옥죄진 못했다.

#1  수련을 한다는 것

장춘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부모님 덕에 학철 씨는 1996년 수련을 처음 접했다. 워낙 주변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많기도 했다. 매일 아침 문화공원에는 300여 명이 함께 연공했고, 많을 때는 800명 가까이 모이기도 했다.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轉法輪)』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서점에서 전법륜을 사서 읽었다. 구구절절 내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다른 사람처럼 건강을 위해 수련한 것은 아니지만, 수련 후 마음이 안정되고 세상을 사는 많은 도리를 이해하면서 97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어느 날, 복통 때문에 근처 작은 진료소에 갔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통증 해소를 위해 진통제를 먹었는데, 구토를 하자 소화되지 않은 약이 고스란히 나왔다. 병원에 수술을 요청했지만,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밤사이 극심했던 고통은 사라졌고, 의사는 어제와는 달리 수술할 필요도 없이 맹장에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것이 수련의 힘이구나!’

#2  박해가 시작되다

학철 씨가 수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파룬궁 탄압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999년 탄압이 시작됐다.

공산국가에서 사는 국민들은 아무 이유 없이도 탄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주기적으로 적대시하는 대상을 향해 총칼을 겨눴기 때문이다. 파룬궁이 표적이 된 이상 수련생으로서 그건 매우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99년 7월 20일, 평소처럼 새벽 연공장에 나갔다. 하지만, 연공음악은 들리지 않았다. 연공장에서 자원봉사하던 수련생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밤 체포된 것이었다. 매일 아침 만났던 수련생이 나처럼 수련한다는 이유로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상황은 매우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불가사의했습니다. 백성들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수련하는데 탄압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것이었습니다”

#3  공포 속에도 알려야 했다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유롭게 연공할 수 없고, 책도 마음대로 읽지 못했다. 공개적으로 책이 불태워졌고, 거짓 방송으로 세뇌가 시작됐다. 그럴수록 수련생들은 바삐 움직였다. 베이징에 상방(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상급기관을 방문하는 것)하러 갔고, 천안문 광장에서 직접 만든 현수막을 펼치다 구치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갈수록 거짓으로 뒤덮이는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수련생들이 붙잡혀 갔지만, 더 많은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기 위해 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던 중 2001년 1월 23일, 중국 관영매체에서는 파룬궁 수련생이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자살했다는 방송을 지속해서 내보냈고, 중국인들의 파룬궁에 대한 오해는 지속적인 세뇌로 인해 극도의 경멸로 가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학철 씨도 억울한 상황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상방하러 갔다 붙잡혀 구치소에 두 번이나 들어가기도 했다. 구치소에 가면 어김없이 감옥 안에는 수련생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수련생들은 일반 범죄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평화롭게 눈을 감고 명상하거나 점잖게 파룬궁에 대한 진상을 알릴 뿐이었다. 그곳에서 삽입방송 준비 전반 과정에 참가했던 류하이보 씨를 만났고, 학철 씨는 구치소에서 나온 뒤 작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류하이보 씨는 삽입방송 후 박해받아 사망했다.)

#4  운명의 그 날

학철 씨처럼 참여하기로 한 수련생들이 조금씩 더 많아지면서, 수련생 18명이 모였다. 장춘에서 2개 조, 숭위안에서 1개 조가 만들어졌다. 역할도 제법 나눌 수 있었다. 학철 씨는 장비를 구해오고 연락을 맡았다. D-day가 목전에 왔을 때, 한 수련생이 말했다. “영상 삽입 후, 우리는 어떻게 될까?”

뻔한 대답일 수 있었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분명 누군가는, 아니 참여한 사람 전부가 처벌을 받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갈수록 억울하게 파룬궁에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공산당국의 폭정과 그걸 그대로 믿어야 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전봇대에 오르고, 미세한 전선 접합 작업을 해야 했고, 조용히 장비를 공급해야 했으며, 안전에 유의하며 상황을 살펴야 했고, 조심스럽게 연락해야 했다.

드디어 2002년 3월 5일, 작전을 개시할 날이 됐다. 연습한 대로 작업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한 팀에서 작업이 늦어져 20분 가량을 기다려 동시 송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공안에 의해 작업에 참여했던 수련생 한 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포위망이 좁혀오는 신호탄이 터졌다.

재빨리 몸을 피했던 학철 씨는 다음날, 우연히 행인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어제 그 영상 봤어? 어쩐지 이상했어. 분신자살은 가짜였던 거야.”  “못 본 게 정말 후회되네. 파룬궁은 역시 죄가 없지.”

천안문 분신자살이 조작된 연극이라는 것, 그리고 중국 밖의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파룬궁을 자유롭게 수련하고 있고, 파룬궁은 매우 좋은 수련이라는 영상은 50분간 장춘시 중국인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5  생존한 자의 책임감

지난해 6월, 신경계(新境界, NewRealm) 영화제작사는 장춘 진상영상 삽입 당시 상황을 재현한 영화 <영원한 50분>을 선보였다. 해외 유일한 생존자인 학철 씨 역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파노라마처럼 20년 전 기억을 떠올려 케이블 삽입 기술에 쓰인 부품을 재현하기도 했다.

학철 씨는 국내에 남아있는 수련생들과 여전히 통화가 어렵다고 했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마지막 책임감을 느낀다며 인터뷰 말미에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제게 남은 책임이 있다면,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세상에 알리는 겁니다. 공산 사회에서 생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산당의 인간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체험했습니다. 직접 겪어본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 밖에 없어요. 이익에 매이지 말고, 절대로 (공산당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글 조윤덕

 

장춘케이블방송 진상영상 삽입 사건은?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후, 중공은 중국 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해 당의 폭력적 근절운동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파룬궁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부추기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정부에 평화롭게 박해중지를 청원한 수많은 사람이 체포돼 고문당했다.

모든 법률적 항소 통로가 차단된 환경에서, 2002년 봄 파룬궁 수련생들은 길림성 장춘시 주택가에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 장비를 설치했다. 그들은 8개 TV 채널에서 약 50분 동안 파룬궁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사람들이 서로서로 연락하면서 방송 소식이 전해져 TV 채널을 맞추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 당시 시청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

중공 관계자들은 송전 출처를 알 수 없어 전원 공급을 차단하고 거리를 어둡게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룬궁이 더는 박해받지 않는 줄 알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축하하기도 했다. 몇몇 수련생이 나가서 파룬궁에 대한 진상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웃과 아이들, 낯선 사람들, 심지어 지역 공무원들까지도 수련생들에게 다가갔다. 모두 그 일에 관해 이야기했고, 몇몇 사람은 수련생들을 축하했다. 어떤 이들은 “파룬궁은 정말 대단해요! 그 일을 어떻게 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