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룬궁 박해로 감옥에 갇힌 부모님… 사실상 고아로 살아온 위밍후이의 이야기

어딘가를 응시하듯,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천진한 소녀의 눈망울이 서글프다. 슬프지만 평온함이 있는 작품 <고아의 눈물>이다. 부모가 중국공산당의 박해로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고아가 된 자녀가 중국에는 많다. 위밍후이(於銘慧)도 그 중 하나. 이제는 성인이 된 그녀가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갑자기 찾아온 비극
위밍후이는 22년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시 시하이린(西海林) 철로농장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셋이 살았다.
어머니가 틀어준 모차르트의 소야곡을 들으며 잠든 밍후이는 평화로운 파룬따파 연공음악을 들으며 일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장에서 우수사원이었고, 성격이 밝았던 밍후이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반장이었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1999년 7월 20일 이후, 천만 가정이 붕괴됐다. 위밍후이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는 각지 파룬궁(法輪功) 자원봉사자 보도소 소장 등과 함께 불법적으로 경찰에 납치됐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나이에 어린 밍후이는 감옥 두 곳을 오가며 지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고, 또 먼 길을 걸어 도착해 10~30분간 두꺼운 유리벽 너머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하지만 얼마 후 이마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가능해졌다. 위밍후이는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찾아간 감옥 앞에서 흐느끼며 발길을 돌려야했다.
건강을 되찾다
아버지 위중하이와 어머니 왕메이훙이 파룬궁을 만난 것은 1994년 봄이었다. 젊은 나이에 위중하이는 류머티즘, 골수염, 말초신경염증, 척추 인대염증, 골다공증 등 난치병인 데다가 허리까지 접질려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도 움직이지 못했고, 의자에 15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의 권유로 파룬궁 ‘창춘 제7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위중하이는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한 기간에 신기할 정도로 식사량이 많아졌다. 평소 작은 밥공기도 다 먹지 못하던 그가 큰 찐빵 2개, 큰 죽 한 사발, 구운 만두 6개를 다 먹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병을 잊었고, 증상과 통증도 사라졌다. 그후 그의 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적이 연달아 나타났다. 밤새도록 딱딱한 기차에 앉았지만, 몸에 통증이 없었고, 손발 관절도 아프지 않았다.
왕메이훙은 유방 양쪽에 종양이 커지고 통증이 심해져 절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남편을 따라 수련을 시작한 뒤 종양이 없어져 유방 절제 수술을 하지 않았다.
약삭빠르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위중하이와 왕메이홍은 딸에게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더 많이 남을 배려하고, 명예와 이익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움에 따르라고 가르쳤다.
길고 긴 고난
부모님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밍후이는 훌륭하게 자랐다. 해외 선발 유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예술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한 그녀는 해외에 나와서야 밍후이왕을 통해 부모님의 박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면회할 때 만나는 부모님은 밍후이에게 웃으며 격려했을 뿐 감옥에서 박해받은 것을 절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적으로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않으며, 때려죽였으면 자살로 처리하고, 신원을 조사하지 말고 시신을 직접 화장하라.”는 명령으로 파룬궁 말살 정책을 실시했다. 공·검·법의 모든 계통은 파룬궁 박해 기구가 되었다. 공안은 사람을 납치하고, 검찰은 기소하며, 법원은 유죄판결하여 불법으로 감옥에 감금했다.
부모님은 모두 파출소에서 모진 박해를 당했다. 아버지 위중하이는 고문실에서 입과 코에 겨자유 두 병을 부어 넣어 호흡곤란의 고통을 당했다. 무자비한 구타로 머리와 얼굴은 찢어졌고, 철제의자에 묶여 구타를 당했다.
어머니 왕메이훙 역시 집단구타로 자백을 강요당했다. 철제의자에 수갑을 채워놓고 3일 밤낮으로 고문 박해해 전신이 부어올랐다.
파룬궁 박해 목적의 불법 기구인 ‘610사무실’의 지시로 감옥에서는 파룬궁수련자의 수련을 포기시키기 위해 소위 결렬서, 회개서, 폭로서, 보증서를 쓰라고 위협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전향 성과에 따라 감옥의 교정 성적, 교도관 승진, 재소자 감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14년간 여러 차례 소위 ‘1급 엄격 관리대상자’로 분류됐다. 전기고문과 구타로 늑골이 골절되고 전신이 상처였다. 감옥 경찰은 영하 10도의 날씨에 옷을 벗긴 뒤 코를 향해 물을 분사해 질식하게 해서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전향서에 서명하게 했다. 정신이 든 아버지가 서명을 폐기한다고 하자, 또다시 전기고문과 혹독한 구타가 이어졌다. 여러 해 동안 수차례 박해로 아버지는 가슴뼈가 튀어나오고, 다리는 절며, 치아는 거의 전부 부러지고 깨져서 성한 치아가 몇 개 없었다.
어머니 왕메이훙 역시 헤이룽장 여자감옥에서 하루도 온전하게 보내지 못했다. 7감옥구역에서 대대장 양화(楊華)의 체벌로 가장 힘든 차간작업실에서 일했다. 180도 고열 기계 2대 옆에서, 7, 8월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고온의 작업실에서 매일 14시간씩 작업했다. 왕 씨는 검었던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사악한 감옥에서 선량함 보여준 아버지
사악한 감옥 안에서도 위중하이는 행동으로 재소자들을 감동시켰다. 빵 한 조각 아까운 환경에서 늘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었고, 다른 누구의 것도 가로채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했다. 순서대로 앞 사람을 때리게 하는 추악한 짓을 시키기도 했는데, 자기는 맞아도 다른 사람을 때리지 않았다. 그가 ‘비판투쟁회’에 회부되었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어 흐지부지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그를 포함해 파룬궁수련생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를 전향시키기 위해 자오둥시 마피아 대부가 협박했지만, 위중하이는 움츠려들지 않고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된 이야기와 인간의 도리, 진정한 수련자로서 바르게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고, “만약 당신이 나라면 양심을 버리고 자신의 사부를 욕하겠는가? 당신이 나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전향서를 쓰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협박하려던 재소자는 도리어 감동하며 “사람은 마땅히 당신같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자신에게는 소박하고 다른 사람을 도왔던 어머니
밍후이는 장기간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가족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1년이다. 아버지가 불법으로 수배되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 어느 날, 밍후이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강가로 갔다. 무단장 강가에서 밍후이는 익숙한 그림자를 보았다. 밍후이는 뛰어가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 아주머니의 배려로 이루어진 극적인 만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밍후이의 기억이 되었다.
밍후이는 부모와 함께 하루빨리 가족이 모두 모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부모님은 해외로 나갈 수 없다.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공직에서 면직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부모님을 위해 밍후이는 학교를 다니면서 알바로 모은 돈을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2019년 중공은 또다시 전국적으로 ‘파룬궁수련생 제로화’ 명령을 내렸다. 파출소와 지역위원회를 앞세워 파룬궁수련생과 가족에게 믿음을 포기하라는 ‘보증서’를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다. 심지어 파룬궁수련생을 직접 대면해 괴롭히는 바람에 위밍후이의 부모는 고향 무단장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2020년 11월 23일 어머니는 하얼빈시 학부서점에서 하시(哈西)파출소 경찰에게 네 번째로 납치당해 수련 포기각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어머니는 현재 중국 하얼빈시 제2구치소에 감금돼 있다.
밍후이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눈이 큰 미인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소박했고, 남이 부탁하면 힘껏 도왔다. 이웃이 자신의 물건을 훔친 것을 알았지만, 이웃의 어려운 형편을 걱정하고, 신고하지 않았다. 박해당해 신체가 불편해진 수련생을 데려와서 돌봐주었고, 어려운 수련생을 보면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왔다.
아버지 위중하이와 어머니 왕메이훙, 딸 밍후이. 22년 째 한 지붕 아래 살지 못한 가족은 언제쯤 함께 할 수 있을까. /룽룽(容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