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평영 세계 1위, 황샤오민 씨의 인생 2막
이제는 한국인이 된 전 중국 수영 국가대표 황샤오민(55) 씨. 세계 평영 일인자였던 그는 현재 서울 노원구민체육센터에서 수영을 가르치고 있다. 23살, 선수 생활을 은퇴할 당시 그의 건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몸 이곳저곳이 탈이 났고, 갑자기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 상태가 지속됐다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게 그의 말이다. 원인을 몰라 손쓸 방법이 없던 고통은 신기하게도 파룬따파(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

평형으로 세계를 제패한 중국 수영 스타
그는 1970년,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 도시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학교를 순회하며 재목을 고르던 수영 코치에게 발탁돼 시 대표로 수영을 시작했다. 근성과 체력을 갖춘 그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고, 각종 대회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년 후, 수영장을 방문한 또 다른 코치의 눈에 띄어 12살에 중국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가족과 떨어져 베이징에서 홀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선수로서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개인 평형 금메달을 시작으로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중국 여자 수영선수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 93년 세계 수영선수권대회에서 총 12개의 메달 중 11개의 메달을 휩쓸었다. 23살, 세계 평영 일인자로 은퇴하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원인을 알 수 없던 병으로 고통받던 시기
선수로서 황금기였던 20대 초반, 그의 손에는 메달이 쌓였다. 가장 건강할 시기, 역설적이게도 그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게 느껴졌고, 때때로 숨을 쉬지 못할 때도 있었다. 디스크로 거동이 불편했고, 몸 이곳저곳에서 탈이나 앓아눕기 일쑤였다.
“검사를 해도 뭐가 안 나왔어요. 심전도도 정상이었고요. 선수들 건강관리를 해주던 주치의도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원래도 약 먹는 걸 싫어하긴 했지만, 검사 상 이상이 없으니까 뭘 할 수도 없었어요. 누가 보면 꾀병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은퇴 후, 그는 1995년부터 한국으로 건너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중국 볼링장에서 우연히 인연이 닿았던 명지대학교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신입생으로 입학해 모든 일과를 소화했다. 건강이 나쁜 상태였지만 학기 중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방학을 맞아 중국으로 돌아가면 그제야 꼼짝없이 앓아누웠다.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파룬따파(파룬궁) 수련을 갓 시작한 부모님이 그의 상태를 지켜보다 함께 수련해 볼 것을 권했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직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파룬따파
97년 겨울, 병마와 싸우는 그를 본 어머니의 친구분이 다시 한번 수련을 권했다. 아무런 희망이 없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영상으로 된 파룬따파 강의를 듣고, 수련 동작인 연공도 시작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수련은 생각지도 못한 기적을 선물했다.
“처음에는 힘들더라고요. 1주일 후, 2장 공법을 하는데 손바닥에서 찬바람이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드라이기에서 약하게 바람이 나가는 것처럼요. 이후 몸이 가벼워졌어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숨을 못 쉬는 증상은 한 달 정도 지나서 싹 사라졌어요. 디스크는 세 달 정도 지나자 다 나았고요. 이후 몸이 좋아졌어요.”
파룬따파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의 비디오 강의도 수련을 지속하는 데 큰 힘이 됐다. 9강까지 이어진 영상 강의는 이후 ‘전법륜’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출간됐다. 그는 마지막 9강에서 운동선수를 언급한 부분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고 털어놨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됐어요. 수련이나 기공을 접한 적이 없어서 잘 몰랐고요. 그런데 9강에서 모든 걸 이해하게 됐어요. 운동선수들은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을 하니 세포 분열이 일반인보다 빠르게 진행된다는 거죠. 세포 분열 횟수는 유한한데 그 과정이 빨리 진행되다 보니 운동선수들이 더 빨리 노쇠하게 된다는 거고요. 제가 그 과정을 겪었기에 정말 많이 와닿았어요.”
그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88 올림픽 시절 인터뷰 사진을 보여주며 “지금이 이때보다 더 피부가 좋다”라며 웃었다.
부딪힘이 있을 땐 항상 나를 먼저 돌아봐
그는 은퇴 전 중국에서 볼링을 잠시 배웠고, 그곳에서 한국인 남편을 처음 만났다. 볼링 선수 출신인 남편은 사업차 중국을 찾았다가 그가 있던 볼링장을 들렀던 것. 그렇게 스쳐 갈 인연인 줄 알았는데 한국 유학 중 찾은 볼링장에서 운명처럼 남편을 다시 만났다.
남편의 자상한 모습에 결혼을 결심했지만,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대부분 남성이 집안일을 많이 했고, 그 역시 아버지가 평생 어머니께 밥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것.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각종 체육회와 센터에서 지도자로 바쁘게 지냈다. 남편과 똑같이 사회 활동을 하는 상황인데 남편보다 자신이 더 가사 일을 부담해야 하는 분위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단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스포츠 관련 지도자이다 보니 가르치려는 습관이 남아있어 소소한 부딪힘이 이어졌다.
“참는 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아마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이혼하고 혼자 살았겠죠. 파룬따파 수련에서는 진선인(眞善忍)을 이야기해요. 착하게 인내하며 사는 건데 남편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가 선하게 대하고 잘 참았는지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남편도 제가 수련해서 그런 걸 아는지 제가 수련하는 걸 정말 좋아하고 많이 도와줘요. 지금은 남편도 많이 변했어요.”
수영 선수로 승승장구하며 쌓아온 ‘내가 최고다’라는 명예와 자부심은 수영을 가르치거나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수련을 시작한 후,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화가 날 때면 밖으로 표출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됐다. 덕분에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에서도 균형을 더 잘 잡을 수 있게 됐다.
‘7.20’ 이후 수련생의 고통 눈감을 수 없어
그는 88 올림픽에서 중국 여자 수영 역사상 첫 메달을 따면서 이름을 알렸다. 18세이던 그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동안 운동만 하느라 공산당에 관심도 없었는데 어머니가 재촉한 것도 있고, 공산당도 저를 입당시키려고 애를 썼어요. 제가 메달을 딴 건 공산당이 배양한 결과라고 선전하려는 목적으로요. 별생각 없이 ‘쾌속입당’을 했다가 2004년, 에포크타임스에서 나온 ‘구평’이라는 책을 보고 탈당을 결심하게 됐어요.”
중국공산당은 파룬따파 수련생이 급격히 늘자 99년 7월 20일부터 탄압을 강행했다. 이후 수천만 명의 수련생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일부는 생체 장기 적출을 당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박해 움직임이 일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내 인권 상황을 알리기 위한 인권 성화 봉송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도 대만과 한국에서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섰다. 유명세가 있던 그였기에 당시 중국에 있던 어머니는 한동안 감시를 당했고, 집안에 커튼을 치고 지내야 할 만큼 압박도 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파룬궁 박해 중지를 위한 서명 용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중국 내 수련생들이 겪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막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진선인을 통해 삶의 의미 새롭게 깨달아
파룬따파 수련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건강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고 수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파룬따파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수련을 하며 사람이 왜 사는지도 깨닫게 됐어요. 진선인(眞善忍)을 통해 반본귀진하는 것, 바로 그것이죠.”
본인이 경험을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나누며 수련을 권하기도 한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따파 수련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파룬따파는 무료고 어디에 가입하는 것도 없잖아요. 그냥 하면 아픈 사람도 건강해질 수 있어요. 또 지금은 자기밖에 모르고 도덕성도 떨어진 세상인데, 파룬따파 수련을 하면 남을 먼저 배려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글/ 이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