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 숨긴 채 증발한 수십만 수련자들, 그들은 어디로

▲ 2013년에 국내 출간된 《국가가 장기를 약탈하다: 중국의 생체 장기적출에 관한 보고서》 (원제: State Organs: Transplant Abuse in China)의 표지.

2000년 전후 중국 베이징의 신방국(청원사무소) 앞과 천안문 광장에서는 기이한 풍경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파룬궁 수련자들이 체포되면서도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끝내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이다.

경찰은 이들에게 일련번호를 매겨 어딘가로 실어 날랐다. 가족조차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 수많은 ‘무명(無名)의 수감자’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기, 중국의 장기이식 산업은 세계 의학계가 설명할 수 없는 기형적인 폭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99년 7월 장쩌민 정권이 파룬궁 탄압을 개시했을 때, 수련자들이 택한 저항 방식은 합법적인 청원과 평화 시위였다. 명혜망이 입수한 베이징 공안 내부 소식통의 자료에 따르면, 탄압 초기인 2001년 4월까지 베이징에 청원하러 왔다가 체포되어 신원이 등록된 수련자만 연 인원 83만 명에 달했다. 신원을 밝히지 않거나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인원을 합치면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미국 국무부의 2008년 종교자유 보고서 역시 중국 노동교양소 수감자의 절반 이상이 파룬궁 수련자이며, 그 수가 최소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구족을 멸한다’는 옛말을 넘어선 ‘제10족’ 직장 연좌제

초기 청원자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게 된 배경에는 중국공산당 특유의 잔혹한 연좌제가 있었다. 당국은 옛 왕조 시대의 ‘구족(九族) 연좌제’에 ‘직장’이라는 열 번째 고리를 추가했다.

특정 지역에서 베이징 청원자가 발생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을 해고하고, 소속 직장 상사를 처벌하며, 동료 직원 전체의 상여금을 박탈했다. 나아가 관할 지방정부 관리의 인사 고과를 깎고 해임 위협을 가했다. 수련자에게 우호적이던 직장 동료들은 당장 자신의 급여가 깎이자 수련자를 원망하기 시작했고, 인사 불이익을 두려워한 지방 관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청원 저지에 나섰다. 각 지방정부의 베이징 주재 사무소는 사실상 자기 지역 출신 수련자를 색출해 잡아들이는 사설 파출소로 변질됐다.

가족과 직장 동료에게 쏟아지는 보복을 막기 위해, 2000년 무렵부터 청원 수련자들 사이에서는 체포되더라도 이름과 주소를 함구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번졌다. 하지만 이 선의의 침묵은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신원 조회가 불가능해지자 가족들은 실종 신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당국은 아무런 법적 제약 없이 이들을 비밀 집단수용소로 빼돌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얻게 된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해외에 체류 중인 인권변호사 궈궈팅(郭國汀)은 자신이 맡았던 상하이 황슝(黃雄)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상하이 자오퉁대학 기숙사에 머물던 황슝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변호사와 가족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전국 어느 수감 시설에서도 그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명혜망에는 이처럼 증발하듯 사라진 이들의 사례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 왕수잉(王素英): 네이멍구 츠펑시 출신의 여성 수련자로, 2002년 동료 수련자 두 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평화 청원을 떠났다. 세 사람 모두 현지 경찰에 납치됐으나, 함께 간 두 사람이 풀려난 뒤에도 왕수잉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 류야야(劉雅雅·실종 당시 24세): 후베이성 징먼시 석유화학학교를 졸업하고 선전에서 일하던 청년이다. 2001년 5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다며 가족과 마지막 통화를 한 뒤 현재까지 생사불명 상태다.

• 류차이충(劉茝崇·실종 당시 40대): 허베이성 신지시 출신으로 1999년 겨울 베이징 청원길에 오른 뒤 소식이 끊겼다. 가족들이 여러 감옥과 노동수용소를 뒤졌으나 모든 기관이 수감 사실을 부인했다.

기록으로 남은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수련자가 이름 없는 번호로 분류된 채 비밀 시설에 격리됐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중국 내 군 병원들을 중심으로 장기이식 건수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한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