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이 있으니 다시 살아나다’ 고대 의술의 신비

고대에는 덕(德)을 생명의 근본으로 여겼다.

옛말에 첫째는 덕(德)이오 둘째는 명(命)이며 셋째는 풍수(風水) 등등을 말했다.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운명이란 여러 세(世)에 쌓은 음덕(陰德)에서 내원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을 본받은 도[道法自然]에서 내원한 고대 중의(中醫)는 기사회생하는 의학적 기적을 끊임없이 연출해 왔다. 만약 덕(德)이 생명의 근본이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고, 신묘한 의술을 가진 의사들이 제때 나타날 수 있는 것 역시 덕(德)과 복(福), 녹(祿)과 수(壽) 사이에 생긴 인과(因果) 때문일 것이다.

떠돌이 의원의 회춘 묘수

남송(南宋)의 고종(高宗)이 아직 강왕(康王)으로 있을 때 한공예[韓公裔, 자는 자의子扆]는 제업(帝業)을 다지고 옥새를 이어받게 한 큰 공신이었다. 소흥(紹興) 연간이 되자 황제는 그를 광주(廣州) 관찰사로 봉하고 궁궐로 불러 만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한공예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

황제는 어의 왕계선(王繼先)을 보내 먼저 치료해 주었으나 어의가 보고는 “이 병은 이미 치료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공예는 숨이 끊어졌고 가족들은 침상을 둘러싸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왕계선은 즉시 임금에게 백은(白銀) 삼백 냥과 명주 삼백 필을 장례비로 하사해 달라고 상주했다.

가족들은 관목을 준비해 한공예를 입관한 후 매장하려고 했다. 문득 집 앞을 지나가던 떠돌이 의원 한 명이 문 앞을 지나다 다시 문으로 돌아와서는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이곳에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한씨 가문의 아들 몇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이 의원을 불러들였다.

그는 한공예의 안색을 살피더니 맥을 짚은 뒤 팔다리에 침을 놓았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하니 한공예의 코에서 한 줄기 숨결이 나왔다. 잠시 후 입에서는 가벼운 신음소리도 흘러나왔다. 의원이 탕약을 먹이고 밤이 되자 그는 완전히 깨어났다.

다음 날, 한공예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백은 3백 냥과 명주 3백 필을 물리겠다고 황제에게 아뢰었지만, 황제는 이를 돌려받지 않고 약값으로 삼아 다시 상으로 하사했다. 한씨 집안의 한 친척은 황제가 이토록 그를 편애하자 “우리 한씨 가문은 늘 청빈(淸貧)했는데, 한공예처럼 정말로 이렇게 한 번 죽을 수 있다면 역시 아주 좋은 일이로구나.”라고 놀렸다.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황제도 기뻐하여 이전보다 더욱 총애했다. 재상인 진회(秦檜)가 부하들을 사주해 그를 탄핵하자 황제는 마지 못해 그를 지방관으로 보냈다. 진회가 죽자 황제는 다시 그의 벼슬을 회복하고 그에게 저택을 하사했다. 고종은 그에게 “나와 태자 모두 그대를 자주 보고 싶어 그대에게 가까운 곳에 머물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공예는 나중에 30여 년간 화용군(華容軍) 절도사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벼슬을 물러나던 해, 효종(孝宗, 고종의 양아들)은 그의 충의(忠義)와 공로를 기리기 위해 특별히 조서를 내려 그가 사는 주군(州郡)의 관아에 그를 후히 대하도록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효종은 그의 벼슬을 올려주고 또 시호를 하사했으며 일가친척 여덟 명을 모두 관리로 봉해 주었다. 임금이 하사한 장례비도 종전의 은견(銀絹, 은과 비단)에서 금백(金帛, 금과 비단)으로 바꿨다.

신뢰와 불심이라는 묘약

만당(晩唐, 당조 말기)시기에 부처 수련을 하던 왕(王) 거사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싱글벙글하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늘 염주를 들고 경문을 중얼거리며 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환약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칠팔십대 고령이었지만, 백발의 동안(童顔)으로 노쇠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의 집안은 위아래로 모두 십여 명이 있는데, 모두 너무 가난하지도 않고 넉넉하지도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남산(終南山) 영응대(靈應台)에 유람을 갔는데, 그곳에서 막 터를 닦은 관음묘(觀音廟)를 보았다. 한 승려에게 알아보니 절을 지을 들보와 기둥은 다 준비돼 있지만 산길이 험하여 엽전 300개를 모아서 인부들을 불러야만 산 아래에 있는 자재를 운반해올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왕 거사는 즉시 10일 이내에 돈을 마련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하산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京城)에 가서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관음묘를 지을 돈을 마련해야 하니 부잣집에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빨리 내게 알려주시오.”라고 일러두었다.

며칠 후,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연수방(延壽坊)에 금은옥기를 파는 집이 있는데, 주인에게 열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데 병이 심해서 많은 의원을 불러도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 가서 보라고 했다.

그는 가게 주인을 보자마자 이렇게 요청했다.

“제가 관음묘를 짓는데 이미 공사가 중단된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나는 먼저 돈을 보내어 그들이 빨리 공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당신 딸의 병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치료할 것입니다. 이것이 치료용 알약이니 잘 보관하시오.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왕 거사는 또 증서를 써서 주인에게 주고 열흘을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가게 주인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라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열흘이 지나 왕 거사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주인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막 관을 준비하자 왕 거사가 지팡이를 짚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돌아왔다. 주인은 그를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관부로 보내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왕 거사가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제가 정말 당신을 속이려 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오. 빨리 따님을 보여주십시오.”

그가 안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는 이미 온몸이 굳어 죽은 지 꽤 되었다.

그는 방을 따로 마련하게 하고, 그 안에 침대를 놓아 딸을 침대 위에 올려놓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서 젖은 버드나무와 회화나무 가지를 태워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게 했다. 또, 몸에 지니고 있던 약 몇 알을 나누어 아이의 이마와 코에 흩어놓고, 사람을 시켜 놋대야를 가져와 따뜻한 물을 담아 환자의 심장 부위에 놓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옆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자신은 집 안에 머물며 문과 창문을 닫았다.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켰다. 방 안의 연기는 모두 흩어졌지만 벽은 그을려 꺼멓게 되었다. 그는 벽에 붙은 재를 닦아서 손가락을 물에 넣더니 “아직 살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때 왕 거사가 다시 사람을 시켜 우유 한 그릇을 가져오게 하고 알약을 으깨어 뿌렸다. 고인의 입술에 우유를 떨어뜨린 그는 우유가 금세 여자아이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별일 없을 겁니다.”라며 기뻐서 말했다.

그 후 그는 죽은 사람의 입과 코에 비단 천을 살짝 걸치고, 다시 그녀의 가슴에 구리 대야를 놓았다. 저녁이 되자 그는 촛불을 켜고 기다렸다. 문득 구리 주전자에서 몇 방울 떨어지더니 몇 시각 후 비단이 약간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이의 입과 코에서 마침내 한 줄기 숨결이 피어올랐다. 또 몇 시각이 지나자 물이 담긴 놋대야에도 물결이 일었다.

왕 거사는 또 그녀의 코에 우유를 조금 떨어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갑자기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그녀의 숨결과 심장박동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을 직접 목격한 가족들은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기뻐했으며, 주인도 왕 거사에게 몹시 부끄러웠다. 오래지 않아 이 아이는 시집가서 여러 아이를 낳아 키운 후에야 세상을 떠났다.

글/ 안문(顏雯), 출처/ 정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