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나눔과 베품’-수나라 이사겸 이야기

수나라의 의인 이사겸은 기근이 있을 때마다 곡식을 이웃들에게 나눠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이사겸(李士謙)의 자(字)는 자약(子約)으로 수나라 조군 사람이다. 그는 천성이 공손하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이어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후 집을 절에 기증하고 더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사겸은 집이 부유했으나 가난한 사람보다 오히려 더 절약했고 늘 타인을 돕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번은 한 형제가 재산을 나누는 과정에 다툼이 생겼다. 이사겸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돈으로 재산이 부족한 쪽에 돈을 보태줬다. 결국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 형제는 서로 재산을 양보했다.

도둑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다

어느 날 이사겸이 자기 논에서 곡식을 훔쳐 가는 도둑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도둑을 잡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천재인화가 이어져 어쩔 수 없어서 한 짓인데 어찌 그 사람을 탓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어느 해 기근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다. 이에 이사겸은 집에 보관하고 있던 수천 석의 곡식을 꺼내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 하지만 다음 해에도 흉년이 들어 곡식을 꾸어간 사람들이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이사겸의 집에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하지만 이사겸은 그들에게 빌려간 곡식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배부르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곡식 차용증을 꺼내 불태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집에 있던 곡식은 본래 다른 사람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구제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지 사재기를 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채무는 다 해결되었으니 더는 이 일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듬해 대풍년이 들었다. 전에 곡식을 빌려 갔던 사람들이 형편이 좋아지자 모두들 빌려 간 곡식을 갚고자 했으나 이사겸은 전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또 몇 해가 흘러 다시 큰 기근이 들었다. 이사겸은 가산을 털어 죽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약 1만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이듬해 봄에 이사겸은 또 많은 식량을 꺼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장례식에 모인 만 명의 사람들

어떤 사람이 그의 행실을 칭찬하며 “당신의 음덕(陰德)은 실로 너무나 큽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이사겸은 “음덕이란 말의 본래 의미는 마치 이명(耳鳴)처럼 단지 자신만 알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한 일을 당신이 이미 알았으니 무슨 음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겸허하게 답했다.

또 어떤 사람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과와 윤회의 도리를 믿지 않고 책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고 하자 이사겸이 말했다.

“선(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기 마련이고 불선(不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게 마련입니다. 윤회에 관해서는 역사 서적과 고서 중에 기재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곤(鯀)이 누런 곰으로 변하고 두우(杜佑)가 두견새가 되고, 포군(褒君)이 용이 되고, 우애(牛哀)가 짐승이 되었다는 기록 및 양호(羊祜)의 전생이 이(李) 씨의 아들이었다는 기록들은 모두 윤회를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사겸은 이처럼 30년 동안 선행을 즐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수 문제 개황 8년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살던 조주(趙州) 일대에서 만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중에 이사겸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자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덕을 쌓은 결과라고 여겼다.

 

『수서(隋書) 열전(列傳) 제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