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문이명(聞以明)
중국은 예로부터 ‘신주(神州)’ 대지로 불리며 풍부하고 다채로운 신전문화(神傳文化, 신이 전한 문화)를 연출해왔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사찰, 도관, 교회는 ‘문화관광 프로젝트’가 되어 각종 기발한 방법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어떤 곳은 온 산에 각종 기이한 신상(神像)을 세워놓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으며 각종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명산대천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예전의 속세와 동떨어진 청정한 수련 장소는 오늘날 ‘돈 찍는 기계’와 중국공산당의 정치 도구로 변했다.
오늘 우리는 수련의 진정한 내포라는 이 거대한 주제를 논하지 않고,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수련(修煉)’이라는 두 글자가 담고 있는 무게를 살펴보려 한다.
수련의 연원을 찾아서
《장자 외편·재유》에는 약 5000년 전 중화민족의 시조 황제(黃帝)의 수련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공동산(崆峒山)에 광성자(廣成子)라는 은자가 살고 있었는데,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지고한 대도(大道)를 수련하는 요결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광성자는 처음에는 대꾸하지 않았으나 황제가 석 달 후 다시 지극정성으로 도를 묻자 광성자는 “지극한 도의 최고 경지는 마음이 텅 비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상태다. 정신을 집중하고 고요히 수련하면 육체는 자연스럽게 바르게 되며, 몸은 청결하고 마음은 맑아진다. 몸을 지치게 하지 않고 정신을 분산시키지 말아야 비로소 장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광성자의 깨우침을 받고 또 다른 도를 닦는 고인을 찾아가 정성껏 수련하며 도를 닦는 좋은 방법을 남겼다. 《황제내경》은 후인들이 황제와 기백(岐伯)이 인체와 우주의 오묘함에 대해 나눈 대화를 정리해 만든 것이다.
동주 시대가 되자 또 한 명의 수련계 핵심 인물이 등장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5천 자를 남겼는데, 그중 많은 논술을 오늘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도가 도라 할 수 있으려면 평상의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수련에 대해 노자는 핵심을 곧바로 지적했다. “재주를 끊고 이익을 버려라”, “소박함을 보고 순수함을 지켜라. 사심과 욕심을 줄여라.”
인류 문명의 ‘축의 시대’
이 시기는 인류 문명의 ‘축의 시대(Axial Age)’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를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고 불렀다. 서양에는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탄생했고, 동양에는 노자, 석가모니, 공자가 잇따라 탄생했는데 이들 세 성인의 출생 연월은 전후 차이가 20년을 넘지 않았다. 이로써 수련 문화의 세 가지 축이 완전히 형성됐고, 도가의 노자, 불가의 석가모니, 유가의 공자는 이후 2천여 년 중화문명의 주맥이 됐다.
서한의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유교가 국교로 확립됐고, 동한 시기에는 도교가 흥기했으며, 한명제(漢明帝)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됐다. 이 세 종교는 서로 흥망성쇠를 거치며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중점을 두면서 반복해서 연출되고 충분히 실천돼 중화 대지에서 무수한 중생을 일깨워 신전문화의 함의를 깨닫게 했다.

갈홍의 정의
위진(魏晉) 시기에 이르러 수많은 수진대도(修眞大道)가 나타나고 은일(隱逸)의 풍조가 성행했다. 갈홍(葛洪)은 이 시기에 태어났으며 스스로 ‘포박자(抱樸子)’라 칭했다. 갈홍은 득도한 수련자였으며 의학과 연단술에 정통했다.
당시 많은 가짜 도와 사도(邪道)가 세상에 유행했는데, 갈홍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 높은 명성을 자처하거나 소능소술(小能小術)을 사용해 세상 사람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갈홍은 또 “신선은 실제로 존재하며 신선의 도는 배울 수 있다”라고 말하며 최초로 수련자의 신분으로 수련의 역사적 근원을 확실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갈홍은 “천지 사이는 밖이 없을 정도로 광활하고, 그 안의 기이한 것들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갈홍은 역사상 신선이 존재했다는 많은 기록을 예로 들었다. 유향(劉向)은 《열선전(列仙傳)》에서 70여 명의 신선을 언급했는데,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정통한 학문을 배워 그의 기록은 믿을 만하다. 또한 많은 정사(正史)에 신선들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위상(魏尙)은 앉은 채로 바로 죽을 수 있고, 장개(張楷)는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만들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모두 양사(良史)의 기록으로 믿을 만하고 증거가 있다. 이런 술법은 모두 신선의 범주에 속하니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현종의 도 홍양
‘장과로(張果老)’는 ‘팔선(八仙)’ 중 한 명으로, 그가 ‘당나귀를 거꾸로 타는’ 형상은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화전설 속 인물로 여기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4사(二十四史)·구당서(舊唐書)》에는 장과로가 실존 인물로 중조산(中條山)에 은거했다고 기재돼 있다.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사신 앞에서 죽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항주(恆州) 산중을 왕래하는 것을 다시 보았고, 항주 자사(刺史)가 조정에 상주하자 당현종(唐玄宗)이 사람을 보내 그를 몇 번이나 청해서야 그는 당현종을 만나러 왔다.
당현종은 장과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점술에 능한 사람을 불러 장과로를 점치게 했지만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고 “그의 생년조차 알 수 없었다”고 했다. 현종은 다시 장과로를 병풍 뒤에 앉힌 채 ‘천안통(天眼通)’을 가진 술사를 불러 보게 했지만 그 역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당현종은 맹독성인 투구꽃즙을 가져와 장과로에게 연달아 석 잔을 마시게 했고 그는 잠이 들었다. 깨어나 거울을 보니 이가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현종은 철여의(鐵如意)를 가져오게 해 썩은 이를 모두 쳐내게 했고, 장과로는 품속에서 약을 꺼내 잇몸에 바른 뒤 다시 잠시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 그의 이가 모두 자라나 있었고, 희고 반짝이며 고르게 나 있자 현종은 비로소 그가 신선임 믿었다.
도를 깊이 숭상한 황제들
진·한 시대에 진시황과 한무제는 모두 도법을 깊이 믿었으며, 사람이 수련을 통해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진시황은 서복(徐福)을 바다로 보내 선도(仙道)를 찾게 해 천고의 기담이 됐다. 한무제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그 자신은 평생 신선의 도를 사모했다.
당나라 초기, 당태종은 넓은 도량을 가졌고, 모든 것을 포용했으며, 유학을 정통으로 삼고 삼교를 함께 중시하는 포용 원칙을 시행했다. 당태종은 일찍이 “짐이 지금 좋아하는 것은 오직 요순(堯舜)의 도와 주공(周孔)의 가르침뿐이다”라고 말하며 유학이 국가의 근본임을 명확히 했다. 동시에 당태종은 불교와 도교도 숭상했는데, 그는 “노군(老君, 노자)이 남긴 모범은 맑고 비움에 있고, 석가가 남긴 가르침은 인과(因果)의 이치에 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이끄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근본을 추구하자면 널리 이로움을 베푸는 정신은 같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불교와 도교가 마음을 정화하고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교화의 공이 있다고 여겼다. 현장(玄奘) 법사가 서역으로 가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오자 당태종은 그를 중시해 불경 75부, 1335권을 번역하게 했고, 불교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었다. 태종 이후, 군주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삼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더 치우쳤지만, 대체로 각자의 위치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당현종 시대에 이르러 도교는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개원(開元) 9년(서기 721년), 당현종은 사마승정(司馬承禎)을 수도로 맞이해 도사 자격을 취득한 첫 번째 황제가 됐다.
개원 10년(722년)에는 양경(兩京, 장안과 낙양)과 각 주에 노자를 숭상하는 현원황제묘와 도교 학생을 배양하는 학교인 ‘숭현학’을 설치하라고 조령을 내렸다. 개원 29년(741년)에 이르러 ‘숭현학’은 정식으로 ‘숭현관(崇玄館)’으로 개칭됐다. 개원 29년(서기 741년)에는 노자의 화상(畫像)을 제작해 천하에 반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개원 21년(서기 733년), 현종은 친히 《도덕경》에 주석을 달고, 《도덕경》을 도경(道經)의 으뜸으로 규정했으며, 《도덕경》을 과거시험 범위에 포함시켰다. 개원 29년(서기 741년)에는 양경과 모든 주에 숭도학(崇道學)을 설립하고, 《도덕경》과 《장자》, 《열자》, 《문자》 등으로 과거시험을 보아 선비를 선발하도록 규정했다.
당나라 시기의 이 일련의 조치는 사람들이 수련문화를 이해하는 데 깊고 두터운 기초를 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