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사막(孫思邈)은 흔히 손진인(孫眞人)으로 불리며 훗날 약왕(藥王)으로 추존되었다. 당(唐) 경조(京兆) 화원(華原) 손가원(孫家原) 사람이다. 대략 수 문제(文帝) 개황 원년(581년)에 태어나 당 고종 영순(永淳) 원년(682년)에 사망하니 향년 101세다. 그의 학문은 대단히 넓고 깊었으며 의학과 약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약물학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 저명한 의약학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는데 특히 암기를 아주 잘했다. 일곱 살 때 하루 천 단어를 외울 수 있어 천재로 알려졌다. 그는 널리 배우고 견문이 넓었으며 다양한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20세 때 이미 경전과 역사는 물론 제자백가의 설에 두루 능통했다. 특히 도학(道學)을 말하길 좋아했고 아울러 불교경전도 좋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에 늘 의생(醫生)을 초청해 치료를 받아야 했고 이 때문에 가산을 소진했다. 때문에 청년 시기부터 의업(醫業)에 종사해 백성들의 질병을 고쳐줄 뜻을 세우고 기황[岐黃 역주: 《황제내경》의 저자로 알려진 기백(岐伯)과 황제(黃帝)를 가리키며 흔히 전통 중의를 가리킨다]의 의술을 연마하는 데 공을 들였다.
황제가 내린 벼슬도 마다하다
의술이 숙달됨에 따라 먼 곳에서도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년이 된 후 태백산에 은거해 의서를 저술하고 연단(煉丹) 활동에 종사했다. 수 문제, 당 태종, 당 고종이 모두 불러 벼슬을 주려했으나 모두 정중한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고 한마음으로 의약연구에 매진했다.
손사막은 수당(隋唐) 양대(兩代)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의술을 갖춘 의사였다. 그러나 그는 명예와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평생 의업에 종사했으며 오랫동안 민간에서 생활하면서 의술을 행하며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그는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서 고법(古法)에 얽매이지 않았고 여러 학파의 장점을 채택했다. 약을 쓰는 것도 본초경서(本草經書)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임상의 필요에 따라 경험방이나 단방(單方, 약물 하나로 구성된 처방)을 사용했다. 그는 방제 활용을 아주 영활하게 해서 변화가 많았고 효과는 탁월했다.
손사막은 민간 의료경험도 매우 중시해서 종종 산을 넘거나 물을 건넜으며 천 리나 떨어진 곳이라도 찾아가곤 했다. 또 하나의 처방이나 치료법을 얻기 위해 천금(千金)도 아끼지 않고 진정한 전수를 얻고자 했다.
이렇게 오대산, 태백산, 종남산, 아미산 등지를 여행하며 약재를 채취하고 약물을 포제(炮制 역주: 한약의 약성을 강화하거나 조절하기 위해 하는 수치와 가공을 말함)했으며, 단약을 제련하며, 약성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이나, 자주 발생하는 병, 특정 지방에 많은 병 등을 연구했으며 치료하기 어렵거나 위중한 환자들을 많이 구했다.
그는 내과(內科)는 물론 외과, 부인과, 소아과, 오관과(五官科), 안과(眼科)뿐만 아니라 섭생, 식이요법, 침구(鍼灸), 예방 및 연금(煉金) 등을 모두 연구했다. 동시에 약물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뛰어난 침구 실력을 보유했다. 덕분에 그는 당대(唐代) 가장 유명한 의학대사(醫學大師)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허약했던 몸도 백 살이 넘도록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의정성에 담긴 의료윤리
손사막은 한평생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특히 환자에 대해 높은 책임감과 동정심을 가졌다. 그가 쓴 ‘대의정성(大醫精誠)’이란 문장은 의료윤리에 관한 명문으로 지금까지도 임상의들에게 큰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 글에서 의사가 되려면 단지 기술적으로 숙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해 성실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는 마땅히 정신을 안정시키고 집중해서 책임을 가져야 하며, 환자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귀하거나 천한 것을 가리지 않았다. 또 나이며 외모, 친분관계 등을 따지지 않았으며 또 친척이든 외부인사든, 총명하든 어리석든, 모두 똑같이 대할 것을 요구했다.
치료 중에는 또 위험을 피하지 말아야 하며 시간이나 날씨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설령 피로하거나 배가 고플 때라도 전력을 다해 환자를 구해야 하며, 또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명예나 이익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몸소 실천해 의사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직접 6백 명이 넘는 나병환자 돌봤고 많은 민중들과 의사들의 편의를 위해 ‘아시혈(阿是穴, 환자의 아픈 곳을 혈자리로 잡고 치료하는 것)’을 창립해 널리 전파했다. 아시혈은 지금까지도 뛰어난 실용가치를 지닌다.
그는 또 급성 요도폐색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파 줄기를 환자의 요도에 삽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요도에 관을 삽입한 것이다. 그의 고상한 의덕(醫德)과 뛰어난 의술은 백세(百世)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후인들은 그에 대해 “의술이 정묘하고 해박하며 그 도(道)가 깊고 두루 통했다. 현재를 통해 과거를 알듯이 미래의 시각으로 현재를 보면, 백세에 실행될 법임을 믿는다.”라고 찬양했다.
천년을 앞선 의술
의약학에 대한 손사막의 중대한 공헌은 바로 ‘복방(複方)’이란 개념을 처음 창립한 것이다. 손사막은 이렇게 과감한 혁신으로 고대 의학 서적 중에서 일부 불합리한 처방을 도태시키고, 민간에서 축적된 소중한 치료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처방을 사용해 의학 발전을 추동했다. 손사막의 의학저서는 중국 의약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고향은 풍부한 약초 산지였고 그는 종종 산이나 들에 나가 약초를 직접 채취하곤 했다. 그는 백두옹(白頭翁)과 황련(黃連)으로 이질을 치료할 수 있고, 상산(常山)으로 말라리아를 치료할 수 있으며, 빈랑(檳榔)으로 촌충을 치료할 수 있고, 주사(朱砂)와 웅황(雄黃)으로 독을 제거할 수 있다는 등의 진일보 연구를 하고 확인했다.
그는 또 민간 경험과 자신의 임상 경험을 종합해 행인, 촉초(蜀椒), 우유와 꿀 등으로 각기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럽인들이 각기병을 처음 논술한 것은 이로부터 약 천 년 후인 1642년이었다.
손사막은 당대(唐代) 이전 임상 경험과 의약학 이론을 총결하고 방약(方藥) 및 침구 서적을 수집했으며 수십 년의 경험을 축적했으며, 많은 경전과 다양한 학파의 방서(方書 처방서)를 수집해 복잡한 것을 줄이고 정밀하고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약 서기 652년 (고종 현경 2년)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 30권을 저술했다. 이 책은 임상 각과, 진단, 침구, 식이요법 및 예방과 위생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비급천금요방》을 편찬한 후 비록 고희가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만족하지 않고 우화등선하려는 큰 뜻을 품었다. 이에 만년(晩年) 30년의 임상경험과 심득을 모아 다시 《천금익방(千金翼方)》 30권을 썼다. 이는 《천금요방》에 대한 전면적이고 유익한 보충이었다.
출처/ 정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