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숨겨진 수련자로서의 일대기

역사서에서 조조(曹操)는 주로 치세의 능신이자 군사학, 문학의 대가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일생에는 신전문화(神傳文化)를 수호하고 도(道)를 닦은 진인(眞人)으로서의 깊은 이면이 존재한다.

조조는 한나라 환제 시절 초나라와 송나라 땅 사이에 나타났던 황성(黃星)의 상서로운 기운에 응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그는 난세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룸과 동시에, 세간에 가득한 사악한 영체들을 몰아내고 정도(正道)를 세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스무 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낙양 북부도위(洛陽 北部尉)로 부임했을 때부터 법도를 엄격히 집행했던 그는 중평 2년(185년) 제남국상(濟南國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영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제남에는 저령(低靈)과 난잡한 귀신들이 진흙 우상을 점거한 채 백성들을 어지럽히는 음사(淫祀)가 극에 달해 있었다.

조조는 부임하자마자 단호하고 신속하게 사단 600여 개를 부수고 진흙 우상을 파괴하여 정도에 부합하지 않는 제사를 완전히 두절시켰다. 이로 인해 군 전체가 청정해졌으며 바른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음사 제거는 그가 훗날 한나라의 승상이 된 후에도 전국적으로 널리 행해졌다.

조조가 이처럼 음사를 타파하고 보여준 위엄은 역설적으로 당대 도교 세력들을 그에게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靑州)의 백만 황건군(黃巾軍, 태평도)을 토벌할 당시, 조조는 겨우 만여 명의 병력으로 30여 만의 군사와 100여 만의 무리를 항복시켰다. 이들이 한나라 조정이 아닌 조조 개인에게 투항한 것은 그를 자신들과 신앙이 같은 ‘동도(同道)’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황건군은 조조가 제남에서 신단을 파괴한 행위가 도교의 지존천신인 중황태을(中黃太乙)의 도에 부합한다고 보았으며, 오직 조조의 명령만을 따르는 청주병(靑州兵)이 되어 그를 보좌했다.

또한 조조는 장로(張魯)가 이끄는 오두미도(五斗米道, 천사도) 역시 자비롭게 포용했다. 장로가 가족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귀부하자 조조는 그를 손님의 예로 맞이하여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고 영토를 하사하는 등 두터운 대우를 베풀었다. 이를 통해 천사도(天師道)는 북방과 강남으로 널리 전파되어 성행할 수 있었다.

이후 위왕(魏王)이 된 조조는 전국 각지의 방사(方士)들을 도읍인 업성(鄴城)으로 초빙하여 다양한 방술(方術)을 경쟁시켰고, 업성은 당대 방술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위나라는 조정의 관리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위아래가 모두 도를 배우고 연마하는 풍속이 크게 흥성했다.

조조가 평생 전쟁터를 누비면서 도막사에서 책을 놓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었다는 증거는 그가 남긴 수많은 유선시(遊仙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존하는 조조의 시 중에서 무려 7편이 선경에 오르거나 신선과 노니는 수련 체험을 담고 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서쪽으로 장로를 정벌하러 가던 중 한여름에 험난한 산관산(散關山)을 넘을 때의 일이다. 소가 나자빠지고 수레가 골짜기로 떨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조는 큰 바위에 걸터앉아 거문고로 황제가 지었다는 청각(淸角)의 선율을 연주했다. 이때 가죽옷을 입은 곤륜산의 세 신선(삼로공)이 나타나 괴로워하는 조조를 천도로 인도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조조는 이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시 《추호행(秋胡行)》에 생생하게 기록했다.

또한 《기출창(氣出唱)》, 《맥상상(陌上桑)》 등의 시를 통해 그는 육룡이 끄는 수레나 흰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구름과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곤륜산과 봉래산에 이르러 서왕모(西王母)와 동군(東君)을 알현하고, 신선 적송자(赤松子), 왕자교(王子喬), 선문(羨門) 등과 교류하며 신약(神藥)을 하사받던 선가의 경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시 속에서 그는 문을 닫고 가부좌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편안하고 담박한 마음으로 탐욕을 없애야 도가 저절로 오며, 기를 아껴야 만년을 살 수 있다는 구체적인 수련 방식과 천기(天機)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는 삶과 죽음이 천명(天命)에 달렸음을 온전히 깨닫고 영웅의 포부와 천도의 인연을 완벽하게 풀어낸 진정한 수련자였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