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금일까?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사소한 삶의 마찰 속에서 침묵하며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은 일종의 너그러움이자 수양이다. 이럴 때 침묵은 확실히 금이다.
글/ 류이(劉毅)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는 한 어머니의 침묵이 불러온 참혹한 비극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고위 장교의 아내였던 그녀는 남편의 발령으로 외딴 시골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집 근처에는 기묘한 창살과 장벽으로 둘러싸인, 마치 ‘농장’ 같은 곳이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곳의 실상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곳이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강제수용소이며, 자신의 남편이 바로 그 죽음의 기계를 총괄하는 책임자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곧 마주하게 된다.
인간적인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저항하는 대신 무력감에 빠져 침묵을 선택했다. 그저 잔인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린 채,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탈출할 기회만 엿보며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버텨낼 뿐이었다.
그러나 죄악을 방관한 대가는 너무나 잔혹했다. 수용소의 정체를 모르는 여덟 살짜리 아들 브루노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철조망 밑구멍을 통해 수용소 안으로 몰래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들은 그곳에서 만난 유대인 친구와 똑같은 줄무늬 파자마 모양의 죄수복을 입고 섞여 들었고, 결국 진실을 깨달은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아들을 찾아 헤매기도 전에,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가스실로 끌려가 목숨을 잃고 만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 어머니의 뼈를 깎는 듯한 통곡은 천지간에 묻혀 그토록 미미하게 들렸다. 마치 하늘도 그녀에게 이렇게 질책하는 듯하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고 살해당할 때 제지해 본 적이 있는가? 죄악 속에서 침묵하며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 역시 범죄다! 유대인들이 매일 독살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조금의 책임도 없는가? 부모가 지은 죄업이 아이에게 미쳐, 아이가 부모를 위해 속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인을 냉정하게 방관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것, 부디 이것이 은막 위의 비극에만 머물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종종 영화보다 더 잔혹하다.
2014년 3월, 네이멍구 츠펑시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주임 양춘웨(楊春悅)는 암세포가 온몸을 뒤덮는 극심한 고통 속에 사망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2005년, 양춘웨의 28세 아들 양지후이(楊志慧)가 차를 몰다 대형 트럭 밑으로 돌진해 두개골이 깨지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멀쩡했다. 양춘웨의 아내는 이 참혹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달 넘게 울며 “우리가 무슨 덕이 부족해서 이런 참사가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잃은 고통과 절망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인과의 법칙은 무쇠처럼 냉혹하다. 양춘웨는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수십 명의 파룬궁수련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수백 건의 억울한 사건을 조작했으며, 천여 명을 부당한 강제노동과 구류에 처하게 했다. 그 아내는 그때 남편에게 단 한 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살인에 대한 묵인과 침묵은 죄악을 조장하고 공동의 업을 짓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죄악이 너무 크면 가족과 후손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아들의 비극은 아버지가 쌓아온 악업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흔히 직접 악행에 참여하지 않기만 하면 자신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충분히 많으면 자신은 그 결과를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중공의 악행에 무관심한 것은 그 악행을 위한 온상을 제공하는 것이며, 엄청난 거짓말을 외면하는 것은 독소가 퍼지도록 방임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수백만 유대인의 고난은 전 세계의 침묵으로 인해 12년(1933~1945년) 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오늘날,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과 생체 장기적출이라는 참혹한 만행 앞에서 수많은 중국인의 외면은 이 재앙을 27년(1999~2026년) 동안 지속되게 했다. 스스로를 기껏해야 방관자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대홍수가 밀려올 때 오직 의인 노아만이 온 가족을 이끌고 방주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정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절 나치 사령관의 아내나 양춘웨의 아내가 정의감으로 남편에게 도살용 칼을 내려놓도록 극력 만류했다면, 결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침묵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아이들은 어쩌면 지금도 부모 품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눈물은 시공을 거스를 수 없고, 통곡도 사라진 생명을 되돌릴 수 없다.
진정한 좋은 사람은 죄악 앞에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침묵의 대가는 악에 휩쓸려 결국 그것에 삼켜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