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리싱(李興)
대련(對聯)은 대우(對偶) 또는 속칭 대자(對子), 우아한 말로는 영련(楹聯)이라고도 한다. 입춘이나 설날에 집 문에 붙이는 대련은 춘련(春聯), 춘첩(春貼), 춘조(春條)라고 부른다.
대련은 복을 빌거나 경구(警句) 외에도 정을 표현하고 뜻을 밝히며, 경물(景物)을 묘사하고, 고사를 빌려 오늘을 비유하는 데 흔히 쓰이며, 풍부한 문화적 소양, 심미적 정취,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다.
대련의 특징은 글자 수가 같고, 문장 끊어 읽기가 일치하며, 품사가 대응하고, 위치가 동일하며, 어조가 조화로우며, 상하 구절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내용 면에서 상련(上聯)과 하련(下聯)은 호응하고 대화하는 관계다.
한신과 관련된 대련
아래에서 먼저 한신 사당(중국 안후이성)에 있는 대련을 살펴보자.
생사일지기(生死一知己: 생사는 한 명의 지기에 달렸고)
존망양부인(存亡兩婦人: 존망은 두 부인에게 달렸다)

이 영련의 상련(윗구절)은 한신(韓信)에게 한 명의 지기(知己), 소하(蕭何)가 있었음을 말한다. 한신이 중용되지 못하자 그를 쫓아가 데려온 사람이 소하이고, 훗날 여태후(呂后)를 도와 그를 죽인 사람도 소하였다. 고사성어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 성공도 소하 덕분이고 실패도 소하 탓이로다)’는 바로 이 이야기를 말한 것이다.
하련(아랫구절)은 한신이 유랑할 때 표모(漂母, 빨래하는 여인-첫 번째 부인)의 은혜를 입었으나, 결국 여태후(두 번째 부인)의 손에 죽게 된 것을 말한다.
한신은 한때 유랑하며 밥을 챙겨준 표모의 은혜를 입었다. 그는 항우(項羽) 휘하에서 낭중(郎中)으로 봉해졌다. 이후 유방(劉邦)에게 귀순했으나 역시 중용되지 못했다. 유방이 남정(南鄭)에 도착했을 때 한신은 도망쳤다. 소하는 한신을 매우 높이 평가해 밤을 새워 그를 쫓아가 데려왔고 유방에게 그를 추천했다. 이에 한신은 단에 올라 대장군으로 임명됐다.
초한(楚漢) 전쟁 중 한신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방이 승리를 거두도록 도왔으며, 한신은 장량(張良), 소하와 함께 ‘한초삼걸(漢初三杰)’로 불린다. 기원전 201년, 한신은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됐다. 기원전 196년, 여태후와 소하의 공모로 한신은 장락궁(長樂宮)으로 유인돼 피살됐다.
악비와 관련된 대련
다음으로는 악비(岳飛) 묘[중국 저장성 항저우 서호(西湖)]의 대련을 살펴보자.
“청산유행매충골(靑山有幸埋忠骨, 청산은 다행히 충신의 유골 묻었고)
백철무고주녕신(白鐵無辜鑄佞臣, 백철은 무고하지만 간신을 주조했네)”
대의(大意)는 이러하다. 청산은 민족영웅이자 충신인 악비를 묻었으니 다행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백철(무쇠)은 본래 잘못이 없는데, 그것으로 간신의 무릎 꿇은 상을 만들어 만인의 욕설을 듣게 됐으니 참으로 억울하다는 뜻이다.

악비는 금(金)나라에 대항한 명장으로, 언성(郾城)에서 금올술(金兀朮)을 크게 격파했다. 금올술은 밀사를 보내 진회(秦檜)에게 편지를 전해 빨리 악비를 살해하라고 사주했다. 진회는 그의 처 왕(王) 씨와 밀모한 후, ‘막수유(莫須有,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씌울 때 쓰는 말)’의 죄명으로 악비를 풍파정(風波亭)에서 살해했다. 이어 간신 역적들은 악비의 장남 악운(岳雲)과 악비의 부하 장수 장헌(張憲)도 살해했다.
악비가 죽은 후 백성들은 통곡했다. 영웅에 대한 숭경을 표하기 위해 사람들은 항저우 서호에 악비를 위해 묘를 쓰고 비석을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또 무쇠로 진회 부부가 무릎 꿇은 상을 주조해 악비 묘 앞에 두었는데, 이는 매국노와 간신에 대한 사람들의 비할 바 없는 증오를 반영한 것이다.
